▣ 2022년 10월 15일 토요일(음:9월 20일 신축) 1410년(조선 태종 10) 평양성 완공 고구려 왕조의 마지막 수도이자 최초의 일원화된 수도이다. 평양성은 산성의 역할과 평성의 역할을 동시에 수행하였다. 고구려의 제24대 양원왕이 세웠다가 제25대 평원왕 때 이전하였다. 당시에는 ‘장안성(長安城)’이라 불렀으며, 또 다른 별칭은 ‘하평양성(下平陽城)’ 또는 ‘한성(漢城)’이다. 본래 고구려의 수도 제도는 평시에 수도 역할을 하는 평지성과 전시에 방어를 담당하는 산성으로 구성된 이중성 체제였다. 대동강과 보통강이라는 자연 해자가 둘러싸여 있고 북쪽으로 산을 끼고 있다. 외성, 중성, 내성, 북성으로 나뉘어 있다. 평양성의 둘레는 17,000m 정도인데, 태봉국 철원성이 12,600m, 고려 개경나성이 23,000m, 조선 한양도성의 둘레가 18,600m이다. 평양 일대는 고조선 영토이며, 고조선이 기원전 108년 멸망한 후 낙랑군 치소가 있던 곳이라고 추정하는 것이 한국 학계의 유력한 학설이다. 훗날 고구려 제15대 미천왕이 중국 군현을 추방하고 고조선 남부의 영토를 수복하였다. 이후 고구려는 평양성을 당시 수도인 국내성 다음으로 중요하게 여겼다. 평양성은 고구려 제2의 도시이자 제2의 수도로서 남한의 중심지가 되었다. 그래서 백제와의 평양성 전투 때 고구려의 제16대 고국원왕이 목숨을 걸고 막으려 했던 것이다. 조선시대에도 평양부의 중심지이자 북방의 주요 요충지로 중요시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 때는 일본군에 함락되었다가 조명 연합군이 되찾았고, 1894년 청일 전쟁 때 다시 청군과 일본군이 평양부에서 싸웠다. 외성 부분은 농경지로, 중성과 내성 부분은 평양시의 중심지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외성은 가장 바깥쪽에 있는 성이다. 평양성은 나성(외성)→황성(내성)→궁성(궁전) 순인 중국 왕조식 도성제를 따른 성이 아니다. 그러나 엄격한 당시의 기준이 없는 현대에는 내부 성벽을 제외한 평양성의 외성에 전체 성벽의 길이를 합친 외성을 대략 나성으로 본다. 외성을 쌓을 때 구간을 나누어 담당자를 정하였는데, 이를 비석에 기록하였다. 발견된 비석에는 566년 11리 구간을 작은형의 상부인 와카모리가 담당하였다고 한다. 569년에는 12리 구간을 물성의 작은형이 맡았다고 한다. 외성에는 모두 4개의 문이 있었다. 외성에는 일반인, 즉 평민이 살고 있었다. 중성에는 귀족 사택과 정부 관사가 있었다. 외성보다 조금 작아 총 5개의 문이 있었다. 고구려 동부, 서부, 남부, 북부, 중앙부의 5부 귀족이 살고 있었으며 고구려 정부 조직의 관사가 밀집해 있었다. 궁전은 내성에 위치하였다. 내성은 왕궁인 만큼 좁을 것 같지만 대부분 중성 정도의 크기다. 조선 태종의 명으로 평양성이 마침내 이루어졌다. 그런데 태종실록에 따르면 도순문사의 박은 역졸한 사람도 엉덩이를 때리지 않았고, 60여 일 만에 큰 역사가 끝났다고 했는데, 역졸한 사람도 엉덩이를 때리지 않았다는 말에 식자들이 비난했다. ▣ 2022년 10월 15일 토요일(음:9월 20일 신축) 1410년(조선 태종 10) 평양성 완공 고구려 왕조의 마지막 수도이자 최초의 일원화된 수도이다. 평양성은 산성의 역할과 평성의 역할을 동시에 수행하였다. 고구려의 제24대 양원왕이 세웠다가 제25대 평원왕 때 이전하였다. 당시에는 ‘장안성(長安城)’이라 불렀으며, 또 다른 별칭은 ‘하평양성(下平陽城)’ 또는 ‘한성(漢城)’이다. 본래 고구려의 수도 제도는 평시에 수도 역할을 하는 평지성과 전시에 방어를 담당하는 산성으로 구성된 이중성 체제였다. 대동강과 보통강이라는 자연 해자가 둘러싸여 있고 북쪽으로 산을 끼고 있다. 외성, 중성, 내성, 북성으로 나뉘어 있다. 평양성의 둘레는 17,000m 정도인데, 태봉국 철원성이 12,600m, 고려 개경나성이 23,000m, 조선 한양도성의 둘레가 18,600m이다. 평양 일대는 고조선 영토이며, 고조선이 기원전 108년 멸망한 후 낙랑군 치소가 있던 곳이라고 추정하는 것이 한국 학계의 유력한 학설이다. 훗날 고구려 제15대 미천왕이 중국 군현을 추방하고 고조선 남부의 영토를 수복하였다. 이후 고구려는 평양성을 당시 수도인 국내성 다음으로 중요하게 여겼다. 평양성은 고구려 제2의 도시이자 제2의 수도로서 남한의 중심지가 되었다. 그래서 백제와의 평양성 전투 때 고구려의 제16대 고국원왕이 목숨을 걸고 막으려 했던 것이다. 조선시대에도 평양부의 중심지이자 북방의 주요 요충지로 중요시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 때는 일본군에 함락되었다가 조명 연합군이 되찾았고, 1894년 청일 전쟁 때 다시 청군과 일본군이 평양부에서 싸웠다. 외성 부분은 농경지로, 중성과 내성 부분은 평양시의 중심지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외성은 가장 바깥쪽에 있는 성이다. 평양성은 나성(외성)→황성(내성)→궁성(궁전) 순인 중국 왕조식 도성제를 따른 성이 아니다. 그러나 엄격한 당시의 기준이 없는 현대에는 내부 성벽을 제외한 평양성의 외성에 전체 성벽의 길이를 합친 외성을 대략 나성으로 본다. 외성을 쌓을 때 구간을 나누어 담당자를 정하였는데, 이를 비석에 기록하였다. 발견된 비석에는 566년 11리 구간을 작은형의 상부인 와카모리가 담당하였다고 한다. 569년에는 12리 구간을 물성의 작은형이 맡았다고 한다. 외성에는 모두 4개의 문이 있었다. 외성에는 일반인, 즉 평민이 살고 있었다. 중성에는 귀족 사택과 정부 관사가 있었다. 외성보다 조금 작아 총 5개의 문이 있었다. 고구려 동부, 서부, 남부, 북부, 중앙부의 5부 귀족이 살고 있었으며 고구려 정부 조직의 관사가 밀집해 있었다. 궁전은 내성에 위치하였다. 내성은 왕궁인 만큼 좁을 것 같지만 대부분 중성 정도의 크기다. 조선 태종의 명으로 평양성이 마침내 이루어졌다. 그런데 태종실록에 따르면 도순문사의 박은 역졸한 사람도 엉덩이를 때리지 않았고, 60여 일 만에 큰 역사가 끝났다고 했는데, 역졸한 사람도 엉덩이를 때리지 않았다는 말에 식자들이 비난했다.